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문단 편집) == 결과 ==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할로 포인트|덤덤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를 말했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이 사람은 아래의 15가지를 듣고 그대는 정말 깊은 뜻을 품고 행동했다면서 사형을 선고받는 일은 없게 해 보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번째 심문까지는 점잖았던 태도가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8차 심문부터는 고압적이고 험하게 바뀌었다.]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 > >'''하나.''' [[1867년|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메이지 덴노|명치천황]][*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고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해는 1912년이므로 의거가 일어난 1909년에는 연호를 붙인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현임 군주라는 의미의 '금상 폐하'로 불렸다. 연호를 붙인 건 죽은 이에게 붙이는 시호에 해당하여 생존 덴노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원문을 적어 놓은 공사관 기록 홈페이지에는 메이지 덴노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폐하 부친 [[고메이 덴노|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 사인은 천연두지만 [[에도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다만 이는 [[심증]] 내지 [[카더라]] 뿐이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는 부분이므로 주의.] >'''둘.''' [[1895년|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명성황후|대한 황후 폐하]]를 [[을미사변|시살한 죄.]] >'''셋.''' [[1905년|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을사조약|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1907년|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정미 7조약|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고종(대한제국)|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헤이그 특사|폐위시킨 죄]]. >'''다섯.''' [[동양척식주식회사|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화폐정리사업|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사관]]과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삼국 화폐 통합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유로화]] 같이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 정도~~ 멀어진 상태였다.]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여덟.''' [[조선교육령#s-3|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신문지법|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정미의병|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義士)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을사오적|오적]], [[정미칠적|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가쓰라-태프트 밀약|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1909년|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기유각서|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메이지 덴노|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청일전쟁|동양 평화의]] [[러일전쟁|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 >[[http://db.history.go.kr/id/jh_097r_0010_1440|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 안중근 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 /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326_0012811935&cID=10101&pID=10100|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또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 고로|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얼빈이 러시아 조차지였기 때문에 원래는 [[베이징]]을 거쳐 [[러시아]]의 [[모스크바]]나 [[이르쿠츠크]]로 넘겨야 했다.] 1910년 3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흔히 알려져 있는 2월 14일은 순국일이 아니라 사형 선고일이다.]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 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은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